




1919년 3ㆍ1운동 당시(16세) 동지들과 함께 태극기 5,000여 장을 제작 및 배포해 시위대 주동자와 함께 정일형 박사도 평양 경찰서에 수감됨. 1937년부터 모교인 연희 전문학교와 숭실 전문학교 그리고 감리교 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했으나 신사참배 반대, 창씨개명 반대 등 배일사상의 선도자라는 죄목으로 1940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해방 전까지 일제하에서 5년의 세월 동안 총 20회에 걸친 투옥 생활을 이겨내며 항일 독립투쟁 끝에 조국의 해방을 맞이함.
1935년 미국 드류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음. 귀국 후 감리교 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였고 중앙신학교 설립 등 젊은 목회자양성에 힘썼으며 또한, 암울한 식민지하에 농촌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선교활동을 통한 종교적 독립운동과 농촌 계몽활동에 헌신함. 정일형 박사는 ‘기독교 정체성’을 유지하며 그 가치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하여 목회와 정치 현장에서 기독교 정신을 구현하고자 노력함.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초대 특사단 부사로 활동하며 그해 10월 제3차 파리 UN 총회의 한국 대표로 UN의 한국 정부 승인을 획득함. 또한, 1949년 UN 한국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며, 1951년 제6차 UN총회에 참가하여 대한민국을 UN의 준회원국으로 가입을 성공시킴. 이후, 1991년 UN 회원으로 가입의 초석이 됨.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으로 (종로/중구) 당선되어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국회 외무위원장 및 간사로 의정 활동과 외교의 보직을 수행했고, 1954년 범야 민주 세력을 단합 ‘호헌동지회’를 결성하였음. 1955년 민주당 창당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자유당의 독재 정권과 투쟁하여 현재까지 70여 년을 이어온 민주당의 창당을 주도하였음. 1960년 4.19의거 후 제2공화국 출범과 함께 제5대 국회의원(중구 을)이 되는 동시에 내각에서는 수석 국무위원으로 외무부 장관을 역임.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1965년 굴욕적이고 불평등한 한·일 협정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1967년 제7대 국회에 진출하여 신민당 부총재로 선임. 1973년 신민당 대표 권한 대행에 추대되고 제9대 의원에 당선, 8선 의원이 됨으로써 한국 의정 사상 지역구 최다선 의원의 기록을 세웠고 가장 긴 의회 활동함.
1969년 대통령의 3선 연임을 통한 독재 장기집권의 개헌 반대투쟁에 앞장섬. 1974년 국회 대정부 발의 중 박정희 대통령에게 “어찌하여 유한한 인간의 지도자가 무한한 국민의 정부를 영구하게 통치하려고 합니까?” 라고 발언하며 ‘장기집권’ 등 7가지의 책임을 물어 대통령의 하야를 촉구함. 1976년 3월 명동성당에서 거행된 유신정치에 반대하는 3.1민주구국선언에 부인 이태영 박사와 함께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3년징역을 언도받아 정일형 박사는 국회의원직을, 이태영 박사는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함. 정일형 박사는 많은 활동의 제약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독재견제와 민주투쟁에 혼신의 힘을 다하며 야당의 선봉에 서서 정면 투쟁함.




